책과 삶

에로스의 모든 것에 대한 고찰 - 플라톤의 향연

IamDreaming 2011. 1. 8. 17:25
반응형

철학과 고전을 읽는데도 단계가 있다고 한다. 생각할 힘을 기르지 못한 체 중독성이 강한 사상가의 책을 읽는다면 생각의 기준이 중립을 지키지 못한 채 특정 사상가에 대한 광신이 되어 버린다. 광신팬이 되어버리면 다른 어떤 책을 읽던 어떤 이야기를 듣던 들리지 않고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의 세인트대학에서는 학년별로 읽어야 할 철학과 고전을 나누어 각각의 학기에 맞는 책을 읽도록 권유, 해당도서를 다 읽은 이후에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있다고 한다. 그런 절차를 밟아야지만 사유의 힘,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생각, 판단, 결정의 힘을 기를 수 있는 것이다.

그 초기목록에 플라톤의 향연이 있었다.
플라톤의 향연은 에로스의 모든 것에 대한 고찰로 얼핏 에로스라 하여 이야기가 야하거니 외설적인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 책은 당시 비극작가인 '아가톤'의 첫 작품이 비극 경연대회에서 수상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베푼 <<향연(축제>>의 자리에서 나눈 대화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스인들은 집안에 대소사가 있을때, 시인이 경연대회에서 수상을 했을때, 어떤일에 성과를 내거나 친지들이 멀리서 방문을 했을 때  어김없이 <<향연>>을 열었다고 한다.

책의 등장인물들은 아가톤의 향연이 있던 그날 서로 모여  '에로스'에 대해 이야기 해보기로 한다.

제일 먼저, 아리스토데모스는 '에로스'를 이렇게 찬양한다.

만일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들로 구성된 도시 국가나 군대를 만들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이상적인 조직은 없을 걸세. 그렇게 되면 불명예스러운 일을 멀리하고 서로 명예를 다툴테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전열을 이탈하거나 무기를 버리는 모습을 자기 애인에게만큼은 절대 보여 주고 싶어하지 않을테니까. 차라리 몇번이고 죽는 편을 택할거리고. 에로스가 직접 용기를 불어넣어 주면 용감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지.

 파우사니아스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이 함께할 때, 각자가 자기에게 걸맞는 관습을 준수해야 실현된다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만족시켜 주는 애인을 위해 행하는 봉사라면 어떠한 것이라도 마땅히 해야하고, 사랑받는 사람은 자기를 현명하고 휼륭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을 위해 마땅히 호의를 베풀어야 하네. 또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의 지성이나 휼륭함을 발전시켜 줄 수 있어야 하고, 사랑받는 사람은 교육이나 지혜를 얻으려고 해야만 할 것이네. 이러한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비소로 사랑받는 사람이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족시켜 주는 일이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지고, 만일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아름답게 여겨질 수 없다네.

에릭시마코스가 말한다.

에로스가 사람의 영혼에만 그리고 아름다운 자들에 대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많은 것들 그리고 다른 것들 속에도, 즉 동물의 육체에도, 땅에서 자라나는 것에도, 다시 말하자면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 있다는 것을 나는 우리의 기예인 의술의 관점에서 깨닫게 되었다고 생각하네. 의술이란 육체의 에로스에 대해서 어떤 것을 채우고 어떤 것은 비우는 지식일세. 훌륭한 의사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어야 하네. 의사란 신체에서 가장 적대적인 요소들을 가져다가 그것들을 친하게 만들고 서로 사랑하게 해야만 한다네.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리듬이나 조화를 사용해야 하는 경우에 작곡된 선율과 운율을 바르게 사용해야 하네, 계절의 특징도 이 대립되는 요소들의 질서를 적절하게 따르는 에로스의 영향을 받을 때 풍년을 가져다 주고 인간이나 동식물의 건강에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는다네.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이 이어지고,아가톤의 연설이 진행되었다.

에로스는 강제로 뭔가를 하는 일이 없지. 에로스는 강제를 당하지 않으니까 말일세. 폭력을 사랑하지도 않는다네. 어떠한 쾌락도 에로스보다 강력하지는 않다네. 에로스는 절제와 많은 관련이 있다네. 또 용기에 관한한 에로스를 당해 낼 수 없다네. 에로스는 너무나 뛰어난 시인이라서 다른 사람들도 시인으로 만들 정도라네. 에로스의 손길이 닿기만 하면 사람들은 모두 시인이 되지. 우리는 이것을 통해 에로스가 넓게 보아서, 모든 유형의 예술적 창작 영역에서 훌륭한 창작자임을 증명할 수 있지.

' 인간에게는 평화를 그리고 바다에는 잔잔한 고요함을,바람에는 휴식을 그리고 고단한 자들에게는 잠을'

<크로노스와 에로스  / 아뇰로 브론치 作 (1540~1545)> 


소크라테스가 아가톤 연설의 뒤를 잇는다. 그는 여사자 디오티마의 가르침을 그대로 인용한다.

사랑의 기능이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아름다움을 낳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육체를 통해서 임신을 하고, 일정한 나이에 이르면 본성에 따라 낳기를 욕망합니다. 그런데 추한 것 안에서는 낳을 수가 없고, 아름다운 것 안에서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결합이 낳는 일, 즉 임신과 출산은 신적인 것이며, 가사자(可死者)인 생물 안에 들어 있는 불사적(不死的)인 것입니다. 이런 일은 조화를 이루지 않은 것 안에서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잉태한 사람이 아름다운 것에 다가가면, 온화해지고 기쁨에 넘치며 평온해져서 출산을 하고 번성하게 됩니다. 사랑이란 좋은 것을 영원히 소유하는 것이고, 그러면 결론적으로 우리는 좋은 것과 함께 불멸성을 필연적으로 욕망하게 됩니다. 이러한 논의에서 역시 사랑의 대상은 불멸성이라는 결론에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되지요.

사랑의 길로 접근하거나 누군가를 통해 그 길로 이끌어지기에 올바른 방법은 아름다운 것들에서 시작해서 저 아름다움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들에게 출발해서 마치 사다리를 오르는 것처럼 아름다움을 쌓아 올라가는 것 말입니다. 하나의 육체에서 두개의 육체로 그리고 다시 두 개의 육체에서 모든 아름다운 육체로, 그런 다음에 아름다운 육체에서 아름다운 관행으로, 이러한 관행에서 아름다운 인식으로, 이러한 인식에서 아름다움 자체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러한 인식에 마침내 도달해서 진정한 아름다움에 인식하는 과정을 완성할 수가 있는 겁니다.
# 아름다움과 사랑의 궁극적 단계에 이르는 길

플라톤은 충고한다. 육체의 아름다움을 넘어 영혼의 아름다움을 깨달아야 한다고. 그래야 아름답지 않은 몸도 아름다운 영혼을 만나 사랑하게 된다. 더 나아가 아름다운 관습과 아름다운 지식을 만나면서 특정한 것에 대한 사랑에서 벗어서 아름다움이란 큰 바다로 흘러들어 마침내 아름다움 자체를 알야야 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을 본 자는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는 사소한 아름다움에 얽매이지 않으며 삶의 가치를 깨달아 영원한 생을 얻게 된다. 이렇게 사다리를 한 계단씩 오르듯, 이 지상의 일시적인 아름다움에서 출발해서 끊임없이 자기를 함양하면서 저 영원한 아름다움과 변치 않는 사랑에 도달하는 것이다.

<아프로디테의 탄생 / 보티첼리 作 (1485년경) <베누스의 탄생>>


이 책은 소크라테스의 연설 뒤에  갑자기 등장한 알키비아데스의 연설를 끝으로 마무리 된다.


책을 읽으며 책의 나 스스로 담론의 50%는 이해를 했는지 의문이다. 그래서 감상보다는 책의 줄거리 위주로 옮긴다. 그렇지만 에로스에 대한 그들의 담론은 가히 놀랍니다. 에로스를 위한 찬양과 수사, 에로스라는 것을 풀어내는 그들의 입담과 찬사를 과연 누가 따라 갈 수 있을까? 사랑이란 단순히 육체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닌 진정한 내면의 아름다움을 깨달으며 변치 않는 아름다움에 도달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그들의 사유를 존경하고 인정한다. 향연을 놀이에만 그치지 않고 토론하며 이야기의 꽃을 피우며 즐겼던 그리스인들, 그리고 철학자들.

그 시대의 다른 이야기들이 사뭇 궁금해 진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