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간의 출장을 위해 책을 한권 샀다. 너무 무겁지 않은 책으로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머릿속을 비우고자 읽을 책인데 내용이 너무 무거우면 오히려 방해가 되는걸 알았기 때문이다. 서점에는 베스트셀러들이 쫙~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박범신의 소설 ‘은교’가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 TV 힐링캠프에 나온 박범신 작가의 어린시절 이야기며 삶을 통해 드러난 고뇌가 나의 마음 한 구석을 심하게 울렸기 때문인 듯 했다. 책을 살 때만 해도 영화를 보지 않은 나로써는 이 책이 야한 책이라는 걸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새 책을 고이 가방에 넣고 출장길에 올랐고 시간이 나는 틈틈이 책을 펼쳐 읽었다. 머지않아 소설의 내용이 기대한 것과, 아니 상상한 것 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야한 듯하지만 야한 영화처럼 선정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미묘한 끌림이 있었고 중독성 이 느껴졌다. 성(性)을 다루고 있지만 그 속에는 인간의 미묘한 갈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단지 그 성은 책을 감싸고 있는 표피에 불과하다고 생각을 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주인공들의 내면적인 갈등이었으니까...
책은 유명 작가 이적요, 그의 제자 서지우, 그리고 은교를 중심으로 내용이 펼쳐진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들은 이적요, 서지우가 죽고 난 후 남겨진 이적요의 일기와 유언을 통해서 서서히 들러나게 된다.
‘은교’를 둘러싼 이적요와 서지우의 갈등은 단지 ‘은교’라는 어린여자애를 사이에 둔 갈등만은 아니었다. 천재 작자 이적요와 재능 없는 작가 서지우의 보이지 않았던 긴장감이 은교의 등장과 함께 서서히 드러났다. 은교를 함께 사랑하게 됨으로써 친밀했던 두 사람은 역으로 서로를 밀어내게 된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결국 자멸의 길로 빠져든다.
소설은 마지막까지 그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이 책은 포르노보다 훨씬 강력한 중독성으로 독자들을 책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책을 읽는 내내 새로 들어나게 될 사실들과 주인공들의 미묘한 감정과 갈등을 읽어내느라 혼이 빠졌다.
책의 내용에 대해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을 때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책 속에 드러난 묘사에 비해 50%도 나타내지 못하는 영상미에 큰 실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의 힘은 인물들 간의 미묘한 갈등이었고,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감정에 대한 세밀한 묘사였다. 하지만 영화는 그 감정들을 섬세하게 작업하지 못했다. 오히려 너무 큰 맥락에서 두 사람의 갈등을 덩어리 채 드러내었고 그 속에 야한 선정성을 담았다. 책을 읽으며 조심스럽게 한 장 한 장을 넘겨야 했던 숨막히던 긴장감을 영화 속에서는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책과 영화를 같이 접함으로써 글이 가진 강력한 힘에 대해 다시 한번 깨달았다. 영화감독의 세밀한 분석력과 정확한 표현력 역시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을테지만 그 무엇보다도 박범신이라는 작가가 써내려간 글의 섬세함에 대해서는 어느 감독이라도 치밀하게 묘사해 내진 못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작자 박범신...
그가 써내려간 글의 매력이 이렇게 클 줄이야...
왜 내가 이 작가를 진작에 알지 못했는지 의아했다. 물론 소설책을 그리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유명한 작자들의 책은 어느 정도 읽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작가 박범신의 책을 이번에서야 만나게 되다니...
이런 기회를 늦게 만나 아쉽기도 했지만 진심으로 재미있게 읽을 책들이 더 있다는 것이, 그리고 다시 만나 볼 작가가 생겼다는 것이 내심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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